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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29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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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의 본질은 군정 실시이므로, 더글러스 맥아더의 포고령 제1호 역시 계엄 포고령이었다. 1945년 9월 7일 요코하마에서 작성된 포고령 제1호는 "본관은 본관에게 부여된 태평양방면 미 육군 총사령관의 권한으로써 이에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과 조선 주민에 대하여 군정을 세우고 다음과 같은 점령에 관한 조건을 포고한다"라고 한 뒤, "점령군에 대한 모든 반항행위 또는 공공안녕을 교란하는 행위를 감행하는 자에 대해서는 용서 없이 엄벌에 처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 포고령 안에도 의사들에 대한 경고 조항이 있었다. 제2조는 "공중위생을 포함한 전 공공사업기관에 종사하는 유급 혹은 무급 직원과 고용인 그리고 제반 중요 사업에 종사하는 자는 별도의 명령이 있을 청약저축 금리 때까지 종래의 정상적인 기능과 의무를 수행하고 모든 기록과 재산을 보존·보호하여야 한다"라고 규정했다.
포고령은 한국인들에게 복종 의무를 부과했다. 제3조는 "주민은 본관 및 본관 권한 하에서 발포한 명령에 즉각 복종하여야 한다"라고 한 뒤 위에 소개한 것처럼 포고령 위반자에 대한 '용서 없는 엄벌'을 예고했다.
마이너스통장 추천 이 포고령에 대한 집단적 대항이 해방 2개월 뒤 전북 남원에서 나왔다. 항일운동가들이 주축이 된 남원건국준비위원회와 이를 계승한 남원인민위원회가 미군정의 부당한 요구에 맞섰고, 이는 그해 그곳에서 미군정 최초의 민간인 집단살상이 일어나는 원인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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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5대 국회의원을 지낸 김응조
ⓒ 열린국회정보포털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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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에서 김응조가 벌인 만행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 기관지인 1945년 12월 1일자 <전국노동자신문> 2면 상단은 11월 16일 상황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무장한 MP 약 3천 명, MG 약 2백 명이 장갑차 2대, 기관총 2대를 휴대하고 남원에 진주"했다고 보고했다 수협 연봉 . 17일 자 상황에 관해서는 "민중이 해산치 아니함을 본 미군은 총검으로 난자하여 민중의 희생이 증대"했다고 전했다.
이런 만행을 앞장서 주도한 인물이 친일파 김응조다. 미군 헌병대 등을 이끌고 남원에 간 것은 친일경찰인 그였다. 전평 기관지는 첫날 상황에 관한 대목에서 "11월 15일 오후 한 시경 전라북도경찰부장 김응조는 무장한 MP·MG 약 40여 명을 인솔하고 남원군인민위원회를 습격"했다고 보고한다. 이날 그의 처사가 남원군민들을 격분시켜 다음 날 미군 병력이 증파됐다. 남원사건으로 불리는 이 민간인 살상은 미군정이 벌인 일이지만, 친일파 김응조로 인해 빚어진 사건이었다.
<친일인명사전> 제1권 김응조 편은 그가 대한제국 멸망 1년 전인 1909년 강원도 고성에서 출생했으며, 일본 괴뢰국인 만주국의 동북하얼빈교도학교 장교반과 2년제 중앙육군훈련처(봉천군관학교)를 졸업했다고 알려준다.
김응조는 4년제인 육군군관학교(신경군관학교)와 더불어 2개의 만주국 육사 중 하나인 중앙육군훈련처를 1936년에 제4기로 졸업했다. 1942년에 제9기로 졸업한 친일파 백선엽의 대선배였다. 1962년 8월 17일에 주한미국대사관이 국무부에 보낸 '한국 군부 내 파벌주의'라는 보고서는 "4기에서 가장 잘 알려진 현존하는 장교"로 김응조를 꼽았다.
견습군관을 거쳐 1936년 12월 기병 소위가 돼 국경감시대에 배치된 김응조는 그 뒤 공보 분야에서 많이 활약했다. 북지방면군사령부 공보처장과 북지파견군총사령부 금성공보장을 역임했다. 만주국 군대에서 그는 중위까지 승진했다. 그런 뒤 "해방 후, 경찰에 투신해 전라북도경찰국장을 지냈"다고 <친일인명사전>은 말한다.
그가 장교반에 들어간 것은 23세 때인 1932년이다. 1931년에 만주사변을 일으킨 일본이 우방인 구미국가들의 비판을 무릅쓰고 만주 침략에 박차를 가하던 시점이었다. 그때부터 1945년까지 만주국 사관학교나 만주국 군대에 의지해 살았으니, 친일재산으로 살아간 기간은 13년이다. 그랬던 인물이 해방 직후 남하해 미군정 경찰에 신속히 적응했던 것이다.
만주국군 장교였던 김응조가 해방으로부터 불과 3개월 뒤에 미군 부대를 이끌고 남원에 갔다. 브루스 커밍스 전 워싱턴대학 교수의 <한국전쟁의 기원>은 "전라북도에서 인민위원회들이 특히 강세를 보인 지역은 도의 외곽 지역에 흩어져 있었다"라며 남원을 가장 먼저 언급한 뒤 "일본인들은 군에 있는 그들의 재산 대부분을 남원인민위원회에 넘겨주었다"고 기술한다. 일본인들이 자발적으로 헌납한 재산을 찾겠다고 김응조가 미군을 이끌고 나타났던 것이다.
첫날인 11월 15일, 김응조는 인민위원회와 청년동맹의 해산을 명했다. 항일운동가들이 주축인 이런 단체들이 친일 경찰의 말을 들을 리 없었다. 그러자 그는 포고령 위반을 이유로 인민위원회의 강홍주·김창한·노무룡·박종암·양판권을 체포했다. 지역민들이 보는 데서 이들을 구타하고 포박했다고 전평 기관지는 보고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지역 운동단체들도 공격했다. "무장 미군을 지휘하야 군인민위원회·노조·농조·해방청년동맹을 포위하고 간판·서류·물품 등 일절을 압수"했다고 기관지는 전했다.
이 상황은 남원 주민들을 분노케 만들었다. 2015년에 <남도문화연구> 제28집이 실은 송정현 전주대 연구교수의 논문 '해방 이후 전북지역 미군정 활동'은 "격분한 100여 명의 군민들이 전주로 돌아가는 김응조 일행에게 습격을 가하는 사건이 발생했다"고 말한다.
사태가 격화된 데는 김응조의 태도도 한몫을 했다. 전평 기관지는 그가 "모호한 언사를 농하며 기만하려" 했다고 말한다. 답변 내용이 모호한 데다가 답변 태도도 농담 비슷했기 때문이다. 공보 장교 출신이 그런 상황에서 군중을 진정시키기보다는 오히려 자극했던 것이다. 그의 태도로 인해 상황이 더욱 악화돼 16일에 미군 병력 3000명 이상과 장갑차 등이 출동하게 됐다.
위 송정현 논문은 병력이 증원된 16일에 주민 16명이 체포됐으며, 17일에는 주민 4천여 명이 남원경찰서 앞에서 항의 시위를 했다고 설명한다. 이날 미군의 발포로 18세 한성배, 18세 박병갑, 33세 김철옹이 희생됐다. 이 논문는 부상자가 7~8명이라고 설명하고, 전평 기관지는 "미군은 총검으로 난자하여 민중의 희생이 증대하며 그 수가 실로 50여 명"이었다고 보고했다.
변신 거듭해 국회의원까지 지낸 김응조
▲ 미 육군 24군단 선발대가 서울에 입성하는 모습(1945.9). 미 군정은 1945년 11월 남원에서 민간인들을 학살했다.
ⓒ NARA
얼마 뒤인 1946년 2월, 김응조는 죄수를 학대했다는 등의 이유로 미군정 경찰에서 해임됐다. 그 뒤 육사를 7기로 졸업하고 육군 제101사단장, 중부지구정비사령관, 제2군사령부 정보처장을 거쳐 육군 준장으로 예편했다.
그가 군복을 벗은 것이 미국 선교사의 제보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위 미국대사관 보고서는 "그는 한 감리교 목사가 이른 아침에 자신의 집 근처에 있는 교회 종을 울렸다는 이유로 구타했다고 미국 선교사가 불만을 제기하여 해고되었다"라고 기술한다.
1945년 8월 15일에 일본제국주의가 몰락했지만, 김응조는 의기소침해지지 않았다. 곧바로 미군정 경찰에 들어가 일본인 재산을 찾겠다며 전북 남원에서 만행을 저질렀다. 이런 모습이 그에게서는 일종의 패턴처럼 나타났다.
1960년 4·19혁명은 이승만 독재정권의 몰락인 동시에 자유당 친일정권의 몰락이었다. 이 의거는 친일파가 행정부·경찰·군대를 움직이는 자유당 정권에 대한 항쟁의 성격도 띠었다. 하지만 김응조는 자유당 친일정권이 무너진 상황에서도 조금의 굴함 없이 정치적 도약을 꾀했다.
1960년에는 무효 선거가 된 3·15 대선을 포함해 대선이 2회, 총선이 1회 있었다. 군에서 예편한 뒤 대한재향군인회 사무총장 등을 지낸 그는 51세 나이로 맞은 4·19를 도약의 발판으로 삼았다. 그해에 그는 총선뿐 아니라 부통령 선거에도 출마했다. <친일인명사전>은 이렇게 설명한다.
"1960년 7월 실시된 제5대 민의원 선거에 전북 고창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했다. 이후 민족민주사회당을 창당했다. 1960년 3월 15일 치러진 제4대 대통령선거가 무효 처리됨에 따라 같은 해 8월 국회의원 간선으로 치러진 대통령선거 때 민족민주사회당의 부통령후보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해방 직후 전북 남원의 민간인 살상에 가담한 그가 15년 뒤 전북 고창에서 국회의원으로 출마했다. 거기다가 정당도 만들었다.
김응조는 서울의 봄과 5·18 광주 학살 이후에도 재기를 꿈꿨다. 1981년에는 민권당의 전국구 후보로 나섰다가 낙선했다. 세상이 격동할 때마다 그냥 앉아 있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1996년에 87세 나이로 죽음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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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인명사전> 제1권 김응조 편은 그가 대한제국 멸망 1년 전인 1909년 강원도 고성에서 출생했으며, 일본 괴뢰국인 만주국의 동북하얼빈교도학교 장교반과 2년제 중앙육군훈련처(봉천군관학교)를 졸업했다고 알려준다.
김응조는 4년제인 육군군관학교(신경군관학교)와 더불어 2개의 만주국 육사 중 하나인 중앙육군훈련처를 1936년에 제4기로 졸업했다. 1942년에 제9기로 졸업한 친일파 백선엽의 대선배였다. 1962년 8월 17일에 주한미국대사관이 국무부에 보낸 '한국 군부 내 파벌주의'라는 보고서는 "4기에서 가장 잘 알려진 현존하는 장교"로 김응조를 꼽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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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국군 장교였던 김응조가 해방으로부터 불과 3개월 뒤에 미군 부대를 이끌고 남원에 갔다. 브루스 커밍스 전 워싱턴대학 교수의 <한국전쟁의 기원>은 "전라북도에서 인민위원회들이 특히 강세를 보인 지역은 도의 외곽 지역에 흩어져 있었다"라며 남원을 가장 먼저 언급한 뒤 "일본인들은 군에 있는 그들의 재산 대부분을 남원인민위원회에 넘겨주었다"고 기술한다. 일본인들이 자발적으로 헌납한 재산을 찾겠다고 김응조가 미군을 이끌고 나타났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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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 육군 24군단 선발대가 서울에 입성하는 모습(1945.9). 미 군정은 1945년 11월 남원에서 민간인들을 학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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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군복을 벗은 것이 미국 선교사의 제보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위 미국대사관 보고서는 "그는 한 감리교 목사가 이른 아침에 자신의 집 근처에 있는 교회 종을 울렸다는 이유로 구타했다고 미국 선교사가 불만을 제기하여 해고되었다"라고 기술한다.
1945년 8월 15일에 일본제국주의가 몰락했지만, 김응조는 의기소침해지지 않았다. 곧바로 미군정 경찰에 들어가 일본인 재산을 찾겠다며 전북 남원에서 만행을 저질렀다. 이런 모습이 그에게서는 일종의 패턴처럼 나타났다.
1960년 4·19혁명은 이승만 독재정권의 몰락인 동시에 자유당 친일정권의 몰락이었다. 이 의거는 친일파가 행정부·경찰·군대를 움직이는 자유당 정권에 대한 항쟁의 성격도 띠었다. 하지만 김응조는 자유당 친일정권이 무너진 상황에서도 조금의 굴함 없이 정치적 도약을 꾀했다.
1960년에는 무효 선거가 된 3·15 대선을 포함해 대선이 2회, 총선이 1회 있었다. 군에서 예편한 뒤 대한재향군인회 사무총장 등을 지낸 그는 51세 나이로 맞은 4·19를 도약의 발판으로 삼았다. 그해에 그는 총선뿐 아니라 부통령 선거에도 출마했다. <친일인명사전>은 이렇게 설명한다.
"1960년 7월 실시된 제5대 민의원 선거에 전북 고창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했다. 이후 민족민주사회당을 창당했다. 1960년 3월 15일 치러진 제4대 대통령선거가 무효 처리됨에 따라 같은 해 8월 국회의원 간선으로 치러진 대통령선거 때 민족민주사회당의 부통령후보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해방 직후 전북 남원의 민간인 살상에 가담한 그가 15년 뒤 전북 고창에서 국회의원으로 출마했다. 거기다가 정당도 만들었다.
김응조는 서울의 봄과 5·18 광주 학살 이후에도 재기를 꿈꿨다. 1981년에는 민권당의 전국구 후보로 나섰다가 낙선했다. 세상이 격동할 때마다 그냥 앉아 있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1996년에 87세 나이로 죽음을 맞이했다.